[정수지의 미술로 보는 마음이야기] 스키조존이 뭐예요?

스키조존이 뭐예요?


2019년 영화 기생충(봉준호 작)이 개봉된 후 필자가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근래에 들어 미술치료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가장 크게 일으킨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의 내용처럼 미술치료사는 그림만 보고 인간의 내면을 해석해 낼 수 있을까? 짧은 답은 아니고 그래서도 안될 일이다.


극 중 제시카(박소담 역)는 자신의 신분을 미술치료를 공부하는 학생으로 가장하여 부잣집으로 침투한다. 방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며 있는 초등학교 3학년인 다송이 (정현중 역) 방에 엄마(조여정 역)와 제시카가 등장한다. 이때 제시카는 “어머님은 나가주세요. 저는 학부모와 절대 수업 같이 안합니다. 내려가 계세요.” 라고 지시한다. 이를 들은 엄마는 당황하며 저항하지만 이내 수긍하고 자리를 비운다. 


                ▲ 미술심리치료연구소 정수지 대표

우선 이 씬에서 미술치료에 대한 허와 실을 몇 가지 짚고 넘어가겠다. 


첫번째로 미술치료사는 권위적인 입장에서 내담자 혹은 보호자와 수직적관계를 형성하는 입장이 아니다. 미술치료사는 강압적인 분위기 보다는 최대한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편안하고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한다.


다만, 제시카가 바르게 명시한 것은 아무리 어린 내담자라 할지라도 아이의 프라이버시를 유지시켜주는 것이 신뢰를 형성하는 첫 단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송이를 엄마로부터 분리시켜 자신만의 공간을 형성해 주는 것은 옳은 접근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 이어지는 씬은 극도로 초조해하는 엄마의 모습이다. 방 안에서 아이와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엄마의 일반적이고도 솔직한 심경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이 장면은 어쩌면 그냥 웃어 넘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아이를 미술치료사에게 데려온 엄마의 심정은 얼마나 불안하고 궁금하고 초조할 것인가?이 점을 헤아려 치료 전후로 보호자의 심리를 안정시켜주는 것이 미술치료사의 역량이며 후에 대화를 엿듣는 가사도우미를 돌려보내는 것 또한 옳은 처세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미숙한 관계에서 트라우마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것과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아이를 봐주겠다는 협박식의 소통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 영화 '기생충' 중 한장면

이어 우리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 그림 오른쪽 하단 스키조프레니아 존에 대한 씬이 등장한다. 극 중에서는 이 곳이 신경정신과적 징후가 잘 드러나는 곳으로 본다는 말을 한다.


스키조프레니아는(Schizophrenia) 조현병을 의미하는데, 이 부분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뇌손상이 있는 내담자의 경우 그림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경우들은 볼 수 있겠으나, 조현병 환자의 징후가 그림의 특정부위에 나타난 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그림만 보고 초등학교1학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은 절대 불가능 하다. 이는 제시카가 미리 이 집안의 내력을 파악하고 왔기 때문에 가능했거나 아이가 직접 털어놓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실적이지 못한 이야기라 볼 수 있다. 그림 속에 트라우마의 단서가 될 만한 정보가 있을 수는 있으나 정확한 시기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미술치료에 대한 잘못된 정보이다. 


하지만. 어떠한 형상이 그림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은 주목해 볼만 하다.


이제 극은 더욱 흥미롭게 치닫는다. 제시카의 엉터리 해석을 들으며 엄마는 크게 동요한다. 이 점이 미술치료의 강점이자 최대 취약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보통 우리는 절박한 심정이 있는 상태에서 심리상담을 받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어떠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느낄 때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찾는 곳이기 때문에 이때 내담자의 불안감을 역이용해서 무리한 해석을 내놓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내담자는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오기 때문에 반드시 자격을 갖춘 전문가를 찾아가야 한다.


다시 다송이의 그림으로 돌아가자. 아이의 그림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우선, 상당히 기이한 형상이라는 생각이 들며 눈, 코의 형태, 굵은 선의 사용이 눈에 띈다. 


필자가 생각하는 미술치료는 미술이라는 매체를 통해 ‘소통’을 하는 것이다. 다송이는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그림에 대한 해석은 항상 상식선에서 시작해야 하며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다송이의 자화상에 있는 눈처럼 눈을 크게 떠보자. 우리가 언제 눈을 이렇게 크게 뜨는지 생각해보면 다송이가 무언가 놀랐거나 흥분된 상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필자는 다송이의 그림이 기이하지만 창의성이 높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전체적인 그림의 구도나 선의 사용 등이 상당히 안정되어 보인다고 생각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불안선 보다는 과감하게 쭉쭉 그려나간 선의 요소 때문에 불안감이 높은 그림은 아니라는 판단이 선다.


필자가 앞서 말한 상식선으로 그림을 함께 살펴보자. 그렇다면 목은 어떠한가? 목은 우리의 무거운 머리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림속의 형상은 마치 얇은 목을 스프링 철이 지지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불안정함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은 가녀린 목을 지지하기 위해 외부의 도움을 받는 유연성과 회복력을 의미하는가? 이는 그림을 그린 다송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정확한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이 그림은 사실 예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래퍼 후니훈, 정재훈 작가의 작품이다. 작가는 오일 파스텔을 사용하여 아이가 귀신을 본 이미지를 표현하였으며 극중에 나온 스키조프레니아 존에 지하의 허리가 굽어 있던 사람을 표현했다고 한다.


또한 인디언을 좋아하는 다송이를 생각하여 텐트의 형상을 넣었다고 한다. 상당히 많은 함축적인 디테일을 가진 이 그림은 초등학교 3학년인 다송이의 그림이라고 보기에는 발달적으로 무리가 있다. 하지만 작가와 감독의 매우 섬세한 의도 하에 만들어진 그림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그림은 실제 조현병을 앓고 있는 내담자의 그림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실제 조현병을 앓고 있는 내담자의 그림은 어떨까? 이 그림은 필자가 조현병 진단을 받은 내담자의 그림을 매우 비슷하게 모사한 작품이다. 이는 빗속 사람 검사 (Draw a person in the rain, DAP) 그림이다. 보통 빗속에 있는 사람을 그리게 되면 그림 속에 우산이나 장화와 같은 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장치들을 그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설명을 듣고 나서도 빗속에 있는 사람이라고 이해하기 어렵다. 조현병은 망상이나 환청, 환영과 같은 증상들을 수반하기도 하며 흔히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해하기 힘든 말이나 행동을 보이곤 한다. 이 그림 또한 그림의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우며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불안한 선의 사용이나 여러 번 반복되는 선의 사용 (보속증: perseveration)이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의사소통으로서의 그림은 한 사람의 언어라고 볼 수 있다. 다송이의 그림은 본인이 귀신을 본 현실을 매우 이성적으로 직시하고 있으며, 소통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묘사한 점에 있어서 실제 조현병 환자의 그림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들과 감정을 그림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해냈을 때, 그 그림은 소통의 창이 된다. 병의 유무를 떠나 그림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과연 나의 그림은 어떠한 말을 하고자 하는가 유심히 들여다보고 귀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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