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지의 미술로 보는 마음이야기] 미술치료를 통해 발견한 트라우마

필자가 열다섯 살 소년 정수를 만난 것은 10년 전 일이다.


한 청소년센터에서 만난 이 소년은 나이에 비해 미성숙해 보였다. 또래보다 훨씬 작은 몸집을 가지고 있던 정수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룹치료 도중 군인에 관심이 많다며 일어나 행진을 하는 시늉을 했다.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또래들의 눈엔 매우 어색한 상황이었다.


정수의 부모님은 정수가 만 2세 때 이혼하셨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는 엄마, 여동생, 조부모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5년간 정수는 20번이 넘는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엄마와 매우 심한 분리불안을 느낀다고 했다.


부친으로부터 학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으나, 정수가 직접 밝힌 적은 없다고 했다.


▲ 정수지 미술심리치료 연구소 대표


정수의 미술활동을 처음 보게 된 건 그룹치료 때였다. 자화상을 그려보기로 한 상황에서 정수는 나에게 점토를 사용해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당시 그룹치료가 이루어지던 공간은 꽤 큰 교실과 흡사했는데, 정수는 교실의 코너에 자리를 잡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한 시간 동안 정수가 공을 들였던 것은 물을 사용하여 점토의 이음새가 보이지 않도록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작품을 표면을 문지르는 것이었다.


▲ 정수의 그림 1


정수는 이 작품의 제목을 등대라고 했다. 실제로 그룹치료 당시에 몇몇 학생들이 지적할 정도로 남근의 형상을 띈 이 작품은 당시 센터에 근무하던 전문가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정수와 나는 개인미술치료를 진행해 보기로 하였다.


정수는 나와 다시 만났을 때, 점토를 사용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점토와 함께 끈, 털실, 깃털 등의 부수적인 재료들을 함께 준비해 주었다.


한 시간 동안 진행된 개인미술치료 상황에서 정수의 몰입도는 매우 높았다. 정수는 점토로 몸통의 형상을 빚어내고, 두 다리를 만들었다. 그 후 거의 30분 동안 두 다리와 몸통을 이어주는 부분에 물을 덧칠하여 문지르는 작업을 하였다. 한참 후 정수는 털실의 색깔이 군복과 비슷해서 마음에 든다며 나머지 시간을 털실로 감싸는 작업에 할애하였다. 빈틈이 없도록 매우 꼼꼼하게 진행하였다.


▲ 정수의 그림 2

정수는 이 작품을 ‘위장하고 있는 남자’ 라고 칭했다. 필자는 정수에게 만약 이 형상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할 것 같은지 물어보았고, "이 사람은 얼굴이 없기 때문에 감정을 느낄 수도 없고 표현 할 수도 없어요.”라고 대답하였다.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던 정수 앞에는 가위가 놓여있었다. 나는 정수에게 역할극을 해보길 권유했고 정수는 매우 흥미로워 했다. 내가 가위를 들자 정수는 갑자기 자신의 작품을 책상 밑으로 숨겼다.


“이 사람은 팔이 없기 때문에 맞서 싸울 수가 없어요. 공격을 당하면 그저 책상 밑에 숨을 수 밖에 없어요.”


필자는 그 당시 정수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으나 정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정수가 퇴원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개인치료는 진행하지 못했지만, 이후 정수가 정신과 선생님과 만나 이 작품을 이야기하며 부친의 성적, 신체적 학대 사실을 시인했다고 했다.

수년간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정수에게 미술이란 매체가 또 다른 분출구의 역할이 된 사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트라우마, 외상이라는 사건은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다.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 우리의 이성적인 뇌는 차단되고, 생존을 위해 본능적인 뇌가 발동 된다. 미술은 뇌의 끊긴 고리를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수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미술은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표현이 가능하다.그로인해 내담자들은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미술치료기법이 트라우마를 겪은 개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저작권자 ⓒ 한국건강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