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제마의 생애에 대해 살펴봤다면 사상의학이 탄생하게 된 의학적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제마가 살았던 조선 후기의 의학 사상과 의료 환경이 그가 새로운 의학을 창안하게 된 의학적 배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기에 이를 먼저 살펴보겠다.
조선의 의학은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의방유취(醫方類聚), 의림촬요(醫林撮要)등의 편찬이후 중국 의학과는 점차 구분되는 독자성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구암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 저술 이후에는 중국의 북의와 남의에 구분되는 독자적인 의학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18세기에 이르러 서울 주변의 인구가 현저히 증가하게 됐으며, 역병이 발생할 경우 전염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서울 주변의 인구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해 발생한 의료 수요를 국가 의료기관인 혜민서와 활인서가 수용하지 못했다. 특히 활인서가 쇠퇴하게 됐으며, 개항이후 보건의료제도의 제정비의 필요성으로 업무 수행 능력이 떨어지게 된 혜민서와 활인서가 1882년에 혁파됐다.
이후 1885년 조선 정부는 서양식 병원으로 제중원을 설립했지만 서양의술의 재생산에 실패했으며, 개항장의 여러 일본의원과 선교사 병원이 설립됐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용하기는 어려운 접근성의 한계를 지녔다. 이러한 의료 환경의 변화는 19세기 후반의 조선인들에게 민간 의원들의 진료를 주로 이용하게 했을 것이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대동법이 정착되어 상업이 발달하여 물류유통이 원활하게 됐으며, 약재의 유통도 점차 많아져 민간의 의학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게 됐다. 이러한 점은 18세기 후반에 지방 의약의 확대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특히 서울에서는 약의, 침의, 종의 외에도 소아과의, 부인과의, 두의 등으로 전문화가 이루어지고, 의원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는 의약의 상업화가 일어났다. 이는 결국 18∼19세기의 조선에서 의료는 공공기관이 아니라 민간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민간주도의료는 결국 민간의료의 임상경험이 다양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의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실학적 사상의 영향으로 임상경험을 중시하는 실증의학이 점차 발전됐으며, 임상경험의 축적은 실증의학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동의보감은 실증의학이 중시되는 의학사상의 흐름 속에서 간결성, 실용성, 임상효과가 뛰어난 것 위주로 발전하여 임상에서 쉽게 활용될 수 있는 제중신편(濟衆新編)과 방약합편(方藥合編)등의 의서가 편찬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앞선 언급했듯이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전염병이 발생했다. 그 중 온역과 두창으로 그 중 온역은 티푸스 계열의 전염병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입혔으며, 두창은 현재의 천연두로 높은 치사율과 후유증을 발생시키는 전국적인 전염병이었고, 마진이라고 불렸던 홍역도 크게 유행했다.
그리고 일상에서는 학질, 임질, 소화기 전염병 및 기생충이 있었으며, 그 외에 나병과 뇌척수막염 등의 질환으로 추정되는 악병이 있었다. 17세기 조선에는 새로운 역병인 당독역이라고 불리는 성홍열이 유행했다.
19세기에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심한 설사가 주된 증상인 괴질이 유행했으며, 나중에 이 괴질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콜레라라고 밝혀졌었다. 이처럼 17-19세기의 조선은 전염성 질환에 대응하는 사회로 볼 수도 있을 정도로 당시 의학은 전염병에 대한 대처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렇듯 당시 조선은 후기로 갈수록 민간의료가 발달했고, 임상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실증적인 의학 사상과 당시 유행하는 전염병은 동무가 새로운 의학을 창안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가 새로운 의학을 창시하게 되는 의학이 당시 의학사상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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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덕진 덕진한방사상체질과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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